‘매카시즘’은 1950년대 초반 미국의 공산주의자 색출 경향을 일컸는 단어로 이를 주도한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시 실제 간첩도 일부 있었지만, 많은 무고한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피해를 봤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단어는 오펜하이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하탄 프로젝트’의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얼마 전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인 책이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에 양자역학을 직접 소개하고 이론물리학을 정립한 과학자이고, 맨하탄 프로젝트 책임자와 고등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 행정가이기도 하다. 짦은 기간에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은 미션을 성공한 오펜하이머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이후 고등연구소 소장을 맡아 20여년을 근무한다. 비록 본인이 원자폭탄 개발 책임자였지만, 소련과 핵개발 무한 경쟁에 도달할 것으로 염려한 오펜하이머는 핵기술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과 과학지식의 공유 등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원자폭탄 개발 이후 더 강력한 슈퍼폭탄 개발에도 반대한다.
승승장구하던 오펜하이머는 과거 공산주의에 동조했던 자기의 이력과 핵개발 정보를 소련으로 넘기려고 했던 인물과 대화를 했던 슈발리에 사건이 빌미가 되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청문회를 받게 된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그와 관련된 사건과 인물, 증언을 기술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의 충성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지만, 일부 부정확한 진술을 꼬투리 삼아 결국 그의 정적(영화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했던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음모대로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당하게 된다. 비밀 취급 인가가 취소됨으로 더 이상 핵심적인 과학기술 정보 접근이 불가하여 깊은 과학연구나 정부 기관의 영향력있는 책무를 맡지 못하게 된다. 청문회 과정에서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이 있고,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정적을 제거하고자 하는 집요한 마녀 사냥(FBI도청, 왜곡된 보고서, 불공정한 청문회 정보 제공 등)에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 중세나 현대나 제대로 된 견제장치가 없으면 언제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오싹함도 느껴진다.
한 시대의 유명 인물의 전기인 만큼 가족,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분위기, 많은 친구, 동료 과학자, 그와 대척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나온다. 영화에서는 크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과학자로서의 업적이나 청문회 이후 정치적으로 소극적이 된 모습나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의 상황도 이 책에는 잘 나와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서술하기 위해 이렇게 세밀하게 조사하여 정리한 것을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다.
영화에서는 핵 폭탄의 개발과 청문회의 모습, 그리고 스트로스와의 갈등들 절묘하게 서로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영화의 많은 장면이나 대사들이 이 책에 있는대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은 유명한 물리학자, 과학자들과 핵 폭탄의 개발 과정의 모습보다는 정치사상에 대한 검증과 그에 대한 여러 갈등이 더욱 주된 이야기이다. 각주를 빼고도 9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많은 분량이고, 아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정치 사상 관련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완독하기에 조금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한번 들여다 보는 경험은 분명 가치 있는 시간일 것이다.
(202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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